안녕하세요. 

서울대학교 25학번 신입생 유진목입니다.

사실 아닙니다. 합격만 하고 등록은 안 했어요.

연대랑 고대도 붙었는데 이 합격증들은 그저 과외 이력서에 추가로 기재될 한 줄이 될 것 같습니다. 한 페이지가 된 데이식스처럼요.

네. 제목과 첫 문단에서 알 수 있겠지요.

수능을 한 번 더 봤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오늘은 수능을 보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작년 (제가 대학을 간 수능, 24수능) 시험을 보고 나서와 이번 (24년 11월에 치러진 수능, 25수능) 시험을 보고 나서 무엇을 느꼈는지 한번 얘기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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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까지 저는 공부에 특별한 소질이 있지도 않았고, 열심히 하는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정해진 범위만큼만 공부하는 학생. 선행도 나가기 싫어서 수학 학원도 중학교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만 다니는 학생.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놀고 싶은 대로 노는 그야말로 평범한 중학생이었습니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나도 서울대에 가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지만, 정작 제 능력이 그에 닿을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남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평범한 중위권 학생일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함 속에 있었습니다.

제가 변한 시기는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시기에 유행하던 두 편의 드라마가 제 인식을 바꿔놓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유명하잖아요, ‘김사부’와 ‘슬의생’. 평범한 중학생답게 저도 이 드라마를 보고 ‘의사가 돼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제 목표는 의대로 굳어졌고, 능력이 닿으면 닿는 대로, 닿지 않으면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순간부터 제 모든 관심사는 입시로 굳어졌습니다. 중학교 시험 기간에도 교과서는 내팽개치고 ‘시발점’을 들었고, PC를 켜면 오버워치가 아니라 수만휘를 찾았습니다. 이 수많은 변화와 집중 속에서, 16살의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우습지만) 연고X비였습니다. 20-21 시즌, 이 시기의 입시를 저와 함께한 분들이 아직까지 이 글을 보고 계실진 모르겠지만… [의대가 가고픈 현실 파악 못 한 중학생]과 [연고X비 시청자]의 교집합은 무엇이겠습니까?

아, 이때부터 제 목표는 의대, 그중에서도 ‘연세대 의대’였습니다. 서울대보다 (사실 여긴 그냥 못 갈 것 같았어요. 그렇게까지 성실하고 똑똑하다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고려대보다, 가톨릭대·성균관대·울산대보다 ‘연세대 의대’가 더 가고 싶었어요.

기숙사 독서대에도, 아이패드 케이스에도 연세대 스티커를 붙였고, 조금씩 지쳐갈 때, 특히 2학년 내신 시험 기간에 공부가 안될 땐 목달장에서 연세대에 재학 중인 선배님들의 글을 보면서 버텼습니다.

'아, 진짜 2년만 기다려라. 나도 아카라카 갈 거니까.'

'음, 수능에서 하나 정도 틀리고 연세대 의대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지.“

이런 상상을 하면서 지독한 내신 기간을 버텨나갔습니다.

뭐, 그랬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고3이 되니 현실은 이상과 달랐습니다. 의대에 갈 수는 있었지만, 목표했던 ‘연세대 의대’는 꿈도 꿀 수 없는 내신. 2학년 때와 달리 애매하게 부족한 모의고사 성적. 결국, 모든 수험생이 마주하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순간이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일단 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다시 돌아오지 않을 10대의 마지막 해를 나름 부끄럽지 않게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를 돌아보면 16~17세의 유진목이 더 간절하고 독했을지도 모르지만, 1년 동안 저만의 페이스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낄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결국 닿는 곳이 연세대 의대든, 전남대 의대든, 아니면 봉선동 러셀이든, 올해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으로 임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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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름 잘 나왔습니다. 11111에 누백 0.3~0.4. (사실 수학 가채점을 잘못해서 인생이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고3 3월뿐만 아니라, 3학년 내내 본 모든 모의고사 중 가장 좋은 성적이었습니다. 점점 그리던 우상향이 수능에서도 그 기세를 이어갔던 것이죠.

하지만 결국 이 성적은 어디까지나 ‘나름’ 잘 본 성적이었고, 연세대 의대는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점수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별로 아쉽지가 않았습니다. 수학 28번을 더 잘 찍었더라면? (22번은 대놓고 틀려서 할 말이 없습니다.) 문학 33/34번을 어처구니없이 바꿔 쓰지만 않았다면? 화학 17번의 함정에만 안 걸렸다면?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능력 밖이더라고요. 

'1년 동안 죽어라 해도 이 정도구나. 조금만 더 하면 올릴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이렇게 1년을 더 버틴다고? 난 무리다. 이제 조금 쉬련다.' 

수능장을 나오면서,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했던 생각입니다. 네, 저는 그렇게 만족했습니다. 비록 수시로 대학을 갔지만, 이 점수로 더 좋은 대학도 갈 수 있었지만, 1년 더 하면 목표했던 곳에 도전해 볼 수도 있었지만, 저는 제 결과에 만족했고, 그렇게 전남대에 입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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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그렇게 대학에 왔는데 학교를 안 갑니다. ‘한 번 더 수능을 볼까? 아니면 그냥 만족하고 집 앞에서 편하게 학교를 다닐까?’ 반수를 할지 말지를 두고 꽤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월이 되고, 다시 9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이제부터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어쩌면 스스로 미루고 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아, 이제는 정말 늦었다. 공부해도 의미 없겠다.’ 그렇게 생각하게끔 제 자신이 일부러 미뤄온 것일지도요. 

재미 삼아 응시한 9월 모의고사는 처참한 성적을 가져왔지만, 그래도 수능은 접수했습니다. 그냥 그 분위기를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기도 했고, 과외를 할 때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9모에서 수학 2등급에 탐구 3등급을 받은 제가 수능에서도 이런 성적을 받는다면 저한테 과외를 받을 사람이 있을 리 없겠더라고요. ‘아, 이건 안 되겠다. 뭐라도 좀 보자.’라는 생각으로 공부를 조금 했습니다. 수학은 과외생 옆에서 기출 문제를 같이 풀었고, 탐구는 작년에 풀다 만 실전 모의고사 3세트를 풀고 그대로 덮어버렸습니다.  

수능 성적표는 -아직도 기억하는데 이거 베를린에서 열어봤습니다 친구들 다 자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폰으로 kice.re.kr 어쩌고...- 예상했던 그대로의 점수가 나왔습니다. 수학과 생명과학Ⅰ은 1등급, 화학Ⅰ은 2등급. 국어와 영어는 1년간 펜을 잡지 않아도 충분히 잘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과목이라 무난하게 나왔습니다. 이 성적으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가,나,다군에 한 장씩 원서를 넣었고, 세 학교 모두 합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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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히려 이때부터 기분이 이상해졌습니다.  

‘정말 핑계 대지 말고 딱 3개월만 집중해서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한 번만 더 불꽃을 태웠다면, 내가 아직도 광주에 있었을까?’  

‘나도 내 고등학교 동창들처럼 연세대 의대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어리석었던 걸까?’  

그 후로 거의 한 달 동안 수없이 망상하고 공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지금은 조금 줄어들었지만요. 

오히려 대충 본 수능에 더 미련이 남다니, 이거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작년에는 ‘내가 이 이상으로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몰아붙이며 공부했기에 후회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수능이 끝난 후에도 ‘조금만 더 했으면 서울대 의대였을 텐데’ 같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제한된 시간 안에서 스스로를 최대로 몰아붙였기 때문에 후회할 여지가 남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번 수능을 위해 제가 한 준비는 겨우 과외를 위한 수학 몇 문제와 탐구 모의고사 몇 세트가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1년이라는 시간 전체로 보면 아주 작은 비중일 뿐이었어요. 그래서일까요? 후회할 빈자리가 너무 커져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 틈 사이로 방패 마크를 단 유진목이 걸어 다니는 가능세계가 보이는데... 이거 정말 눈물 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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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지금부터 수능까지의 여정에서 후회할 빈자리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능이 다가올수록 화나고 짜증 나고 힘들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12월이 되면 조금씩 느껴질 거예요. 감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다는 것을. 

힘든 감정은 금방 사라집니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 감정이 사라진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 그 결과를 보고 또다시 짜증이 나지 않을까요? 그런 배드엔딩을 피하기 위해, 최선의 결과를 손에 쥐기 위해, 그리고 후회 없는 과정을 만들기 위해 끝까지 달려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